- 벼 -
  벼뿌리가 나란히 누워 있는 황토산 아래
달팽이마냥 겨울 논은 겹쳐 쌓여 있다
누런 황금알을 서걱이며 익어가던 나락
계절의 웃음이 지나간 뒤편
띄엄띄엄 벼뿌리 주위로 한 뼘 씩
눈이 내려쌓여
얼음 위에 하얗게 눈집을 지었다
이따금 논두렁엔 잔설이 녹다 얼고
멀리 산봉오리엔 허연 기침소리가 들리는데
아버지는 날카로운 낫으로 한 움큼 나락을 베어내었다
낟가리가 쌓일 때마다
젖빛 웃음을 띄우던 막내녀석이 눈에 밟혔다
못자리를 띄우고
긴 여름의 별밤을 헤아리시고,
떡을 치다 땀을 훔치시던 아버지는
칠순 노모의 푹패인 볼우물을,
또 그렇게 세월에 패인 주름을
가슴에 안고 가셨다.
막내는 아버지가 지상을 떠나는 날에도 떡을 먹었다
떡에서 나오는 하얀 김을 먹었다
임진강 어느 나루터에 하얀 뼈를 뿌리고 떠나신 아버지
많은 세월의 마디가 흩어지고 또 흰눈이 내리고
차창 너머 찬 겨울이
옛날 어디에서 들었던 기침소리를 내었을 때
겨울 논바닥에 싸리꽃처럼 흩어진 벼뿌리를 보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염려되어 어둔 밤 눈이 되어
지상에 곱게 손을 모으시고
볏뿌리 위로 소복이 하얀 쌀을 쌓으시고
보라는 듯 기침소리를 내신다
이 지상의 모든 벼는 익어 누렇게
한 생애를 밝히고
베고 난 자투리 흔적에도 우주를 넘어간 사랑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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